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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읽기/철학] 기계론에서 행복론으로논문 읽기 2021. 10. 20. 18:17
제목: 기계론에서 행복론으로: 라메트리의 기계론과 생명, 죽음, 그리고 행복
저자: 여인석
발행일: 2014.12.
발행처: 한국의철학회 의철학연구 18 p.33-51
URL: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6092503
문득 파우스트가 불쌍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로 인해 그는 가장 행복한 순간, 가장 붙잡고 싶은 순간에 죽을 것이 예정된 세월을 살았다. 그를 떠올리며 내 불안에 대해서도 곰곰이 되새겨봤다. 어느 임계치를 넘어선 행복감을 느끼면 나는 불안을 느낀다. 돌연사하는 개복치를 떠올린다. 오늘 밤 침대에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 뜨지 못할 거라는 공포가 엄습한다. 당장의 행복감을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이 자라나 행복의 필연적인 끝 - 그러니까, 죽는 것 - 을 더욱 무서워하도록 만드는 것이리라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행복과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지 궁금해져 논문 검색 사이트에 '행복 죽음'이라고 검색했다. 노년과 잘 죽는 것을 다룬 논문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노년까지 한참이 남았다. 그리고 심장마비와 돌연사에 대한 두려움은 웰-다잉으로 극복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별 소득 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내리고 내리디가 마침내 라메트리의 기계론을 다룬 이 논문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라메트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기계론과 유물론 등등에 지식이 많진 않지만(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논문 제목에 행복과 죽음이 함께 등장하므로 지금부터 알아가보기로 했다.
기계론과 유물론
논문을 읽기 전에 기계론과 유물론이 뭔지 대략은 알고 있어야 하겠지 싶어 인터넷을 뒤적였다. 보아하니 라메트리는 의사였고, 기계론과 유물론 모두 의사와 제법 잘 어울리는 이론이었다. 신과 영혼으로 세상을 설명하던 관점에서 벗어나는 걸음이었다. 기계론(mechanical philosophy)은 자연을 물리학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우주를 시계에 빗댄 설명이 기계론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시침이 지금 12시를 가리키고 있다면, 그 시계는 한 시간 전에는 11시를 가리켰었고 한 시간 후에는 1시를 가리킬 예정이다. 이렇듯 세상이 물질과 그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물리 법칙에 따라 현재 상태로부터 과거와 미래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론을 주장한 많은 학자가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자'의 존재를 긍정했고, 중력이나 관성 등 물리학적인 개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와 홉스가 대표적이고, 뉴턴도 그들과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유물론(materialism)은 만물의 본질을 정신이 아니라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는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라메트리는 사실상 기계론과 관점을 함께 하는 '기계적 유물론'을 주장한 사람 중 하나였다. 기계적 유물론자들은 세상을 물질에 작용한 물리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다만 인간의 정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의견이 갈렸다. 데카르트와 같이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이원론자가 있는가 하면, 정신을 물질의 한 가지 성질로 보는 등 그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원론자가 있다. 라메트리는 일원론자에 속한 것 같다.
생명체의 발생과 우연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읽어보자.
해당 논문은 라메트리의 책 '에피쿠로스 체계'로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동물의 탄생과 죽음을 서술해뒀다. 라메트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당시에 제기된 여러 학설을 차용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둘 점이 있는데, 라메트리는 1700년대 초반에 태어나 18세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 시대의 생명과학이 지금과 같은 주장을 했을 리 없다.
'에피쿠로스 체계'에서 라메트리는 전성설을 지지한다. 전성설은 '씨앗' 안에 이미 작은 존재가 들어있고, 그것이 수정된 뒤에 적당한 크기로 자라난다는 주장이다. 이 씨앗들은 공기 중에 항상 떠다니다가 자신과 같은 종의 (수컷) 개체에게 이끌려서 코와 입 속으로 들어간다. 몸 속에 들어간 씨앗은 생식기에 자리 잡고 체온을 받아 숙성되다가 여자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난자와 만나 자란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은 어디에서 발생했는가? 라메트리는 최초의 인간이 땅에서 잉태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인간 씨앗'이 땅과 만나서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는 땅에서 태어난 태초의 인간들은 지금과 다소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연이 '실수'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 생식에 필요한 기관이 모두 갖춰진 개체들만 살아남고 보존되어 지금과 같이 인류를 구성했다는 게 라메트리의 주장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듯 특정 목적을 가지고 모든 신체 기관들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목적이랄 게 없는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라메트리는 찰스 다윈보다 100년 가량 일찍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라마르크보다 다윈에 가까운 진화적 관점을 가졌다는 게 내게 놀랍게 다가왔다. 물론 라메트리가 받아들이고 주장한 것들엔 엉뚱한 내용이 더 많다. 땅에서 최초의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러니까 라메트리는 진화를 이해하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적자생존 자연선택은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메트리가 우연을 자연의 기본 작동 원리로 채택한 것은, 자연이 만약 어떤 목적을 가지고 변화하는 거라면 자연재해와 같은 해로운 일들 또한 의도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연은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이 생명을 만든 것은 우연이었기에 생명을 죽이는 것 역시 우연의 산물이어야 한다. 자연이 우연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을 조작하는 초월자가 없다는, 기계론적인 발상으로 귀결된다.
존재들의 연속성
우리가 생태계와 진화와 먹이사슬을 배우듯, 라메트리의 시대와 그 이전에도 생명체 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논문에서는 그것을 '존재들의 연쇄'에 대한 이야기라고 부른다. 라메트리는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개체 간의 유사성을 관찰하며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했다. 그는 심지어 '식물로서의 인간'이라는 책도 집필했다. 자신의 글에서 라메트리는 동물과 식물의 유사성을 짚으며 그들이 서로 연속적이고 이어져있음을 강조했다.
라메트리의 연속성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재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동물도, 식물도, 모두 '같은 반죽으로 만들어졌고 효모만 다른' 존재들이다. 생명체의 발생은 식물에서 출발해 폴립을 거쳐 동물로, 동물 중에서도 인간을 향해 이행하는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방향성은 생명체 간의 우열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이들은 결국 같은 본질에서 비롯됐으므로 적당한 교육을 받은 다음에 서로의 역할을 대신 할 수도 있다는 게 라메트리의 생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구조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들의 감각기관과 내장 구조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유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동물들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소리를 내고 먹이활동을 한다. 위장으로 소화를 시키고 대장을 거쳐 배설한다. 뇌의 모양도 상당히 유사하다.
연속성에 대한 라메트리의 생각을 요약하자면, 그는 생명체들이란 어떤 '조직'들로 구성된 '조직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조직의 다양성이 결국 서로 상이한 조직체의 발현으로 이어졌지만, 이들이 모두 조직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가진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위를 생각했다는 점에서 다시금 그가 기계론적 유물론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계론과 행복론
이제 본격적으로 라메트리의 생각이 행복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아직까지는 라메트리와 진화론 이전의 생명과학에서 어떻게 행복에 대한 메세지가 도출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논문 저자가 나를 놀래킬 차례다.
저자 여인석 교수는 죽음에 대한 라메트리의 견해로 논의를 시작한다. 라메트리가 자연 속 존재들을 '조직'들로 구성된 '조직체'로 봤다고 조금 전에 설명했었다. 인간을 조직체, 하나의 기계로 간주하면 보통과는 조금 다른 휴머니즘을 가지게 된다. 지극한 기계론자는 인간의 범죄행위까지도 자연의 이치를 따른 어떤 기계의 행동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인간의 부도덕성에 염증을 앓지 않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라메트리에게 죽음이란 조직체의 조직들이 흩어지는 현상일 뿐이다. 영혼이 빠져나가 천국으로 향하거나,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 그는 죽음을 슬프고 엄숙한 결말로 조명하기보단 하나의 물리적인 과정일 뿐이라며 슬픔을 거세했다. 죽음이란 무(無)이고, 무에서 유로 발생한 우리가 무로 돌아가는 거라고, 시계가 돌고 돌아 다시 자정에 도달한 거라고 설명했다.
죽음 이후엔 아무것도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있는 시기를 행복하게 보내야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걸까. 여기, 논문에 인용된 라메트리의 말을 재인용하겠다.
우리는 모두 반(反)-스토아주의자가 될 것이다. 이 철학자들은 슬프고 엄격하며 고집스럽다. 우리는 쾌활하며 다정하고 관대할 것이다. 그들은 온통 영혼이며 자신들의 육체를 무시한다. 우리는 온통 육체이며 우리의 영혼을 무시한다. 그들은 쾌락과 고통에 둔감하다. 우리는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들은 숭고한 것들을 열망하며 모든 사건들 위로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이 되기를 그치는 한에서만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을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명령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지배와 우리의 복종을 인정할 것이다.
그는 육체에서 비롯되는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말한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 죽을 때까지 육신을 지닌 채 살아간다. 이런 맥락에서 라메트리는 건강을 강조했다고 한다. 우리 그가 의사였다는 점을 잊지 말자. 우린 육신이 느끼는 감각들을 체험하면서 하나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 깨달음은 바로 생명이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어려운 게 아님이다. (다른 종류의 학식은 우리의 행복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데, 그것들을 탐구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한다. 참말로 공부하기 싫게 만드는 주장이다.) 우리는 그저 삶의 무상함을 느끼면서 죽음을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온전히 누려야 한다. 내가 누리는 감각에 행복해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고, 그렇다고 그것을 갈망하며 서두르지도 말고 운명이 흘러가는 대로 흔들흔들 따라가는 것이 라메트리가 생각한 이상적인 삶의 모습인 것 같다.
상당히 재밌는 논문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합의점을 보는 듯했다. 다윈 이전의 18세기 생명과학은 무속신앙을 연상시켰다. 과학으로부터 삶에 대한 관조적인 태도를 이끌어낸 것도 다분히 종교적으로 보였다. 21세기의 과학에 길들여져있던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라메트리의 관점에선 파우스트가 전혀 불쌍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일생을 신앙과 공부에 바쳤던 사람이었지만, 악마와의 내기를 시작한 이후부터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 쾌락적인 삶을 살아낸다. 그는 행복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죽는데, 이는 달리 생각하면 죽음의 순간까지도 행복했다 말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러니까 파우스트는 충분히 잘 살다가 떠난 사람인 거다.
나는 여전히 내가 돌연사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이 공포감을 일상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면 내 유한한 행복은 흐트러져버릴 것이다. 행복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최대한 건강하게 누리려고 애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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